2023. 12. 2. 16:45ㆍ경제
새해를 앞두고 각 기관의 경기 전망 보고서가 쏟아지던 지난해 말. 시장조사기관들은 2023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업황을 이렇게 내다봤다. "4년 만의 역성장." -12%라는 처참한 성장률을 기록하며 혹독한 겨울을 보냈던 2019년의 악몽이 다시 한번 되풀이될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23년 말,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가 지난 11월 28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5201억 달러(약 672조4893억원)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전년 대비 9.4% 줄어든 수치다. 지난해 말 WSTS가 제시한 성장률 전망치(-4.1%)보다 더 악화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4년 만에 역성장할 거란 예측은 기정사실이 됐다.
국내 반도체 산업도 거센 한파를 이겨내지 못했다. 반도체 수출 실적은 15개월째 감소세(전년 동기 대비)다. 지난해 8월 전년 동기 대비 반도체 수출 증감률이 –7.8%로 꺾인 이후 지난 10월(-3.1%)까지 줄곧 '마이너스'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기업들의 세부사정도 마찬가지다. 국내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는 삼성전자 DS(Device Solutions) 부문과 SK하이닉스는 지난 1~3분기 연속 수조원대의 영업손실을 냈다.
■ 반도체 전망➊ 긍정론 = 그렇다면 내년 반도체 시장은 어떨까. 기나긴 침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일단 긍정적인 지표들이 적지 않다. 먼저 WSTS는 내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5884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시장 규모(전망치)와 비교하면 13.1% 성장할 거란 얘기다.
WSTS에 따르면 내년 반도체 경기 회복을 견인하는 건 메모리 반도체다. WSTS가 전망한 내년 메모리 반도체 성장률은 무려 44.8%에 달한다. 메모리 반도체의 주요 수요처인 스마트폰ㆍPC 시장이 올해는 침체했지만, 내년엔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인공지능(AI)용 메모리 반도체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고용량 DDR5 등 차세대 제품의 시장이 개화하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인 요인이다.[※참고: 내년 메모리 반도체 성장률 전망치가 높은 건 기저효과도 감안해야 한다. WSTS에 따르면 올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전년 대비 31.0% 감소했다.]
그 때문인지 메모리 반도체 업황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인 '가격'도 조금씩 꿈틀대고 있다. 지난 6월 2.930달러였던 D램(DDR4 16Gb) 가격은 지난 11월 3.339달러로, 같은 기간 3.854달러였던 낸드플래시(MLC 64Gb) 가격은 3.875달러로 올랐다.
또다른 지표도 있다. 국내 반도체 수출 실적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올해 들어 줄곧 두자릿수를 유지했던 반도체 수출액 감소율(전년 동기 대비)이 지난 10월엔 한자릿수로 바뀌었다. 이는 반도체 수출 실적이 회복되고 있다는 시그널로 읽혔고, 반도체 반등론에 힘을 실었다.
■ 반도체 전망➋ 비관론 = 하지만 섣부른 낙관론은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숫자의 함정에 빠질 수 있어서다. 먼저 최근 상승세를 그린 메모리 반도체 가격을 살펴보자. 통상 가격이 오르는 덴 두가지 이유가 있다. 수요가 늘어나는 경우와 공급이 줄어드는 경우다. 여기서 업황 개선의 시그널로 읽을 수 있는 건 수요가 증가할 때다.
문제는 현재 메모리 반도체 가격의 상승을 견인하고 있는 게 '수요 증가'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되레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감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올해 감산에 나섰는데, 그게 가격 상승을 이끌었을 거란 거다.
팔리지 못한 채 쌓여있는 재고가 여전히 많다는 게 그 방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9월 국내 반도체 산업의 재고지수는 238.0으로, 제조업 평균(121.0)은 물론 전년 동기(150.7)와 비교해도 훨씬 높았다. 재고지수가 여전히 높다는 건 수요가 살아나지 않으면 내년에도 극적인 회복세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참고: 재고지수의 기준은 2020년이다. 2020년 재고량을 100으로 놓고 비교해 지수화했다. 아울러 계절적 요인에 따른 변수를 없애기 위해 계절조정작업을 거친 수치다.]
반도체 수출 실적의 회복 시그널도 낙관적으로만 해석하긴 이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 지난 10월 반도체 수출액 감소율이 한자릿수로 떨어진 건 분명하지만 여기엔 기저효과의 영향도 컸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언급했듯 지난해 반도체 수출액이 감소세로 돌아선 건 8월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줄어든 건 그해 10월부터다. 월별 110억 달러대를 웃돌던 반도체 수출액이 10월 들어 90억 달러대로 떨어졌고, 한자릿수에 그쳤던 수출액 감소율도 10월부터 두자릿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반도체 수출액이 이미 크게 감소했기 때문에 올해 10월 수출액 감소율이 회복된 듯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 반도체 전망➌ 숱한 변수들 = 숫자의 함정만이 아니다. 반도체 경기 회복 가능성을 좀더 면밀하게 따져보기 위해 살펴야 할 변수들도 있다. 첫째 변수는 고高물가ㆍ고高금리에 따른 소비 위축이다. 앞서 말했듯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기 위해선 수요 회복이 중요하다.
아직까지 반도체(특히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주요 고객은 스마트폰ㆍPC 제조사들이다. 그만큼 스마트폰ㆍPC가 많이 팔려야 반도체 시장도 살아난다. 하지만 '블랙프라이데이 특수'마저 사라진 현재의 고물가ㆍ고금리 상황이 내년에도 이어진다면 얼어붙은 소비심리가 회복되길 기대하긴 어렵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2024년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을 봐도 내년 세계 경기를 긍정적으로 보긴 어렵다. OECD와 IMF는 각각 내년 세계 경제 성장률을 2.7%, 2.9%로 예측했는데, 이는 올해 전망치(OECD 3.0%ㆍIMF 3.0%)보다도 더 낮은 수치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금리의 인상 추세가 꺾이긴 했지만 실질적인 인하가 이뤄지기 전까지 소비심리가 살아나긴 힘들 것"이라면서 "내년 하반기쯤엔 지금보다 나아지겠지만 당장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설명했다.
둘째 변수는 중국 시장이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가장 큰 반도체 시장 중 하나다. 특히 국내 반도체 산업에 중국 시장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액이 전체의 40.3%(2022년 기준)에 달할 만큼 비중이 높아서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 부동산발 위기로 인해 경제 성장에 빨간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과의 갈등 전선이 갈수록 확산하면서 반도체 관련 산업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 10월 미국이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를 더욱 강화했는데, 이로 인해 중국 내 반도체 생산ㆍ개발이 제한되면 국내 반도체 업체들도 피해를 받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시한 지역별 매출 현황을 살펴보면 최근 중국 시장의 상황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미국ㆍ유럽ㆍ아시아(중국 제외) 등 지역은 지난해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크게 증가한 매출이 올해 빠졌다가 최근 들어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반면, 중국 시장 매출은 지난해부터 크게 감소한 이후 아직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시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세계 반도체 경기가 회복한다고 해도 국내 반도체 산업이 반등할 수 있는 폭은 반쪽밖에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자! 이제 결론을 이야기해보자. 혹독했던 2023년이 저물면 세계 반도체 시장에도 봄이 찾아올까. '4년 만의 역성장'을 전망했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서로 다른 시그널을 보내는 지표들과 숱한 변수들로 인해 반도체 시장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사이클에 의한 경기 둔화가 지속했으니 내년엔 다시 회복할 거란 전망이 많은데, 실제로 올해보다 내년이 더 나아질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하지만 반도체 시장이 얼마나 개선될지는 예측하기 어렵고, 변수도 너무 많다"고 말했다. 반도체의 봄을 기대할 만한 상황인 건 맞지만, 아름다운 봄을 방해하는 변수도 숱하다는 거다. 2024년 반도체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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