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사과’ 빗장 풀릴라…국내 재배농가 벌써 ‘불안’

2024. 1. 17. 10:52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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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사과 수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농업계에 파문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특히 주요하게 거론되는 미국산 사과는 상대국의 시장 개방 압박이 큰 데다 저관세·무관세 대상 농작물인 만큼 수입 문이 열리면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최근 사과 수입과 관련한 설명자료를 냈다. 앞서 한 매체가 “과일 가격 안정을 위해 정부가 미국·뉴질랜드와 사과 수입 검역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보도한 것을 ‘낭설’로 일축하는 내용이었다. 농식품부는 “정부는 사과·배뿐 아니라 오렌지·망고 등 상대국에서 수입 허용을 요청한 농산물에 대해선 과학적 근거에 따라 수입위험분석 절차를 진행해오고 있으며 이외 다른 요인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식물 위생·검역(SPS) 조치에 따라 검역상 문제로 사과·배 등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외국산 사과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면 국내에 미발생한 병해충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입위험분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은 ▲접수 ▲착수 통보 ▲예비위험평가 ▲개별병해충위험평가 ▲위험관리방안평가 ▲검역요건 초안 작성 ▲입안 예고 ▲고시 등 8단계로 진행된다. 미국과 뉴질랜드는 1990년대에 수입위험분석 절차 개시를 요청한 후 현재 3단계인 예비위험평가를 진행 중이다.

농정당국은 사과 수입 검토 사실을 부인했지만 농업계에선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물가당국이 과일 등 농축산물을 물가 상승 주범으로 지목하고 수시로 수입 카드를 만지작대기 때문이다. 이달초에도 정부는 ‘민생경제 1호 정책’으로 농축산물 수입 문턱을 대폭 낮춰 물가를 잡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끈질기게 한국 과일시장 문을 두드리는 국가들의 행보도 불안을 부추기는 요소다. 특히 중국 다음으로 사과를 많이 생산하는 미국은 오래전부터 한국시장을 눈독 들였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2018년부터 매년 ‘국별 무역장벽보고서(NTE)’를 통해 한국이 사과시장을 불합리한 기준으로 개방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2023년 NTE’에도 SPS 조치와 관련해 한국 사과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런 상황에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현재 우리 정부가 가입을 추진하는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은 ‘SPS 완화’를 핵심 의제로 다루고 있다. 30년 가까이 사과 수입위험분석을 기다리고 있는 CPTPP 회원국인 일본·뉴질랜드는 한국이 CPTPP에 가입하면 수입위험분석을 재촉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CPTPP 회원국은 아니지만 이들 국가와 비슷한 시기에 수입위험분석을 요청한 만큼 양국 관계 등을 고려할 때 미국의 요구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SPS가 완화되면 미국산 사과는 한국 수출에 날개를 달 공산이 크다. 한·미 FTA에 따라 미국산 사과의 관세 장벽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후지’를 제외한 미국산 사과 품종의 관세(45%)는 이미 2021년 철폐됐다. 현재 15.7%인 ‘후지’의 관세율 역시 점차 낮아져 2031년 완전히 사라진다. 수입 문이 열리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후지’뿐 아니라 ‘허니크리스프’ ‘엔비’ ‘코스믹 크리스프’ 등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미국산 사과들이 싼값에 풀릴 우려가 높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16년 ‘사과 SPS 수입 금지 조치 해제의 경제적 효과 실증분석’ 보고서를 통해 “2018년 수입이 허용되고 국산과 외국산 사과 간 선호가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사과부문 피해액은 연평균 4080억원, 농업 국내총생산(GDP) 피해액은 5980억원 수준으로 전망된다”고 짚었다. 2021년 기준 국내 사과 생산액 1조3769억원에 견주면 사과 수입으로 국내 사과 생산의 29.6%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얘기다.

농업계는 정부의 사과 수입 조짐에 강하게 반발하며 농산물 가격 안정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전국사과생산자협회는 최근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 대표 과일인 사과가 수입된다면 단감과 배 또한 수입이 진행될 것이며 이들 품목농가의 폐원과 작목 전환은 전체 과수 품목이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불러올 것”이라면서 “물가를 잡고 농산물 가격을 안정화하기 위해 외국산으로 대체한다면 한국 농업 생산기반을 무너뜨리는 정책이 될 것”이라고 규탄했다.

배용규 경북 동안동농협 조합장은 “지난해 이상기후로 자연재해가 유난히 심해 사과 수확량이 크게 줄었고, 아예 수확을 포기한 농가도 많았다”며 “불과 2∼3년 전 사과 산지가격이 20㎏들이 한상자당 2만∼3만원으로 폭락해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했을 땐 정부에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더니 최근엔 사과를 물가 상승 주범으로 몰아 수입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농산물 가격 불안의 가장 큰 피해는 결국 농민이 보는 만큼 수입 같은 단기 대책이 아니라 안정적인 생산을 뒷받침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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